전파 공익성
지역신문하면 곧 문화면과 지역 종합판을 대표적으로 떠 올린다. 그만큼 지역의 이슈는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며, 어떠한 문화적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 지느냐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다. 지역의 공중파 방송도 곧 마찬가지다. 정치, 경제 뉴스야 중앙의 전파를 받아 대부분 송출하지만, 지역 현안과 더불어 로컬프로그램의 자체 제작 내용은 문화와 관계되는 지역 소식이 주를 이룬다.
이제 익명의 다수가 아니라 표적이 되는 특정 부류를 겨냥한 방송(narrowcasting ; 峽送 -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여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들이 속속 등장하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상파 방송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고, 질 높은 삶의 영위를 위해 가장 가까이 하는 오락매체 혹은 교양습득의 진원도 그것이라 칭할 수 있겠다.
문제는 가까운 데 있다. 바로 시청자의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옛말이 있듯이, 현대 매스미디어의 특장이라 일컫는 다매체 다채널시대에 부응하여, 공중파가 싫으면 pointcasting(點送 : 이용자 개개인의 요구에 따라 원하는 채널이나 프로그램 혹은 정보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형태의 정보서비스)형태로 소비자는 전환할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유료라는 제약에 걸리고 만다.
지역방송. 그중 민영방송의 운영원칙은 지극한 경제 논리에 의해 존립하는데, 이 시장 논리에 너무 집착한 부분이 여실하여 브라운관 앞에 눈을 둔 시청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언제부터 지역문화가 상업적 대중문화에 점철되어 있어서 방송은 그 부분을 선택․강조하고 있는 건가? BBC의 경우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방송의 교육적 측면은 강조해 마지않을 터이다. 나아가 지역의 관심사와 정서적 공감대 형성에 지극한 영향을 끼치고도 남음이 있다.
방송사의 수익, 그 수익에 따른 사업의 제반 형태. 과연 지역문화와 예술을 염두에 둔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한 적 있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매일 브라운관 앞에 앉아서 서울에서 내려오는 대중가수와, 수준 미달의 상업적 어린이극과, 국적 불명의 번안 뮤지컬의 광고 홍수에 시달려야 하는가.
여기에는 방송사 전파의 대중침투력을 이용한 ‘수익사업’이라는 알짜 프로젝트가 존재 하는데,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하는 광고영상은 대중에게 문화 향유의 대상을 변질시키는 패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방송사의 주최, 주관, 후원의 형식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단순한 광고 계약에 의해 입지가 다르기도 하다.
지역의 문화와 예술은 돈이 없어 그 대단한 위력인 방송전파를 살만한 여력이 없다. 그렇다면 부딪히지 않는 정보는 잊혀지기 마련일 터, 우리 시대 문화예술은 중앙집권적인 대중문화, 저급예술이 전부라는 등식이 자연스레 지역민의 의식 속에 굳혀지고 말 것이다. 수억을 들였으니, 수억을 빼내려면 그만큼 방송은 공해처럼 시청자의 안방을 무시로 무단 침범해야 할 상업적 수단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우리 지역의 대표적 현대식 극장(공연장)의 수탁 운영에 도내 방송사가 불을 켜고 덤비는 연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쟁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돈이 되는 사업이며, 특단의 노력과 아이디어 없이도 - 그 묘한 ‘영상’의 영역이 ‘공연’의 영역을 빌어 - 수익을 올리는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금전만능 주의의 철학 없는 기획사들 또한 크게 반성해야 한다. 어떻게든 돈만 된다면 청소년들 호주머니를 털 궁리로 온갖 연예인들을 사들여 방송을 이용하는 행태는 뭔가 도덕적 강제 장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방송의 사전적 의미는 Broad(넓게) Cast(던지다), Point(방송국) to Multipoint(익명의 다수에게)로 요약된다. 시사, 교양, 오락 등 유익한 삶의 정보를 불특정 다수인에게 널리 유용되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다시금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은 열악하다. 그 미흡하고 척박한 땅덩어리의 주인들은 아직껏 (변질된 지방문화의 집산인)중앙문화에 짓눌려 압사 직전에 있다. 이제 방송은 지역에 대한 식지 않은 애정을 다시금 널리 던져야 할 소임을 깨달아야 한다.
박 병 도 (연출가, 전주대학교 교수)
[전라일보] 칼럼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