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글 창고

자유롭다는 춘향이

 " 작품과 나" -- [문화저널]誌                                          

      창무극 [춘향전]--창무극 '춘향전'은 본인의 각색,연출로 공연하였으며, 국내 최초로 전곡 국악관현악으로 편곡되어 연주한 작품으로서, 1993년도 대전세계무역박람회 경축공연으로 [엑스포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호암 아트홀] 초청공연,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대한민국문화사절단 공연작], [광주비엔날레 경축공연], [전주,무주 동계유니버시아드 경축 전국순회공연], [동서화합을 위한 교류공연] 등으로 7년여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공연된 작품이다.

       

      자유롭다는 춘향이                   박병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은 기성 제품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 입고 사는 것에 불과하다. 색상이 다르고 무늬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는 것은 고유성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중략 -다르면 얼마나 다르며, 고유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해 아래 고유한 것은 더 이상 없다.'(이승우/작, 독(毒) 중에서)

      독(毒)에는 '새처럼 자유롭다'는 관용구에 안위하는- 녹슨 기성에 침을 뱉는 이단자적 모습이 보인다. 새들이 '새처럼' 자유로운 것이 라면 꽃이나 돌이나 사람은 왜 자유롭지 않으며, 또한 새의 날개에 대한 터무니 없는 오해는, 그들이 '날아 다녀야만'하는 '숙명'을 '자유'로 규정해 버리는 기성관념 안에 늘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꽃이나 돌이나 사람이 새처럼 자유롭지 못하다는 관념은, 새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새'가 있고, '자유롭지 않은 새'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허망한 지혜가 아닐 수 없기에, 병든 새. 배고픈 새, 사랑을 잃고 우는 새 , 근심이 가득한 새가 날아다니는 창공을 기성화된 고유성에 대입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동물원 우리 안의 동물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것처럼, 새들도 역시 우리 안에서 훨훨 '날아'다니며, 그것은 '어슬렁'거리는 자유와 '훨훨' 나는 자유의 차이일 것이며, 새들의 자유도 창공이라는 우리 안의 자유일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두는 '숙명' 안의 자유일 것이고 '숙명'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

      작가의 상념은 늘 새로운 심연의 지하세계를 파고드는 습성이 있기에, 그 상념의 날개는 훨훨 날아 원시의 고유한 지평 위에 안착하고파 늘 파닥거린다. 그러나 늘 저만의 세계의 아무도 보지 않는 언덕에 서서 발가벗고 환희의 춤을 춘다한들, 그 성취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승전의 춤이 얼마만의 자유희구의 몫으로 침전이 될까.

      우리는 이미 기성복을 걸쳐 버린「춘향」을 숱하게 만났고, 그 여자는 절대로 외간남자에겐 치마말미를 쥐어주지 않으며, 또한 이십이 안된 나이에 전광석화 처음 만난 사내와 사랑을 하게 되고, 만난 지 수 시간만에 치마끈을 풀어 줬으며, 절대로 감옥에서 죽을 수 없는 운명으로 존재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돌려놓을 수 없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초연되었을 때, 브로드웨이 극장 앞에는 수많은 크리스찬이 피킷을 들고 와 "왜 지저스가 인간이냐? 신이다. 고로 청바지를 벗겨라"고 데모를 했다. 마찬가지로 저 신성의 대명사요, 절개의 화신이 감옥 안에서 죽어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민중의 희망과 의사를 무시한 이단적 비행(飛行)기록이 될 것이 자명한 일이고, 그렇게 허망히 죽어 버린 놈의 절개는 어느 짝에 쓸 것인지 권선징악의 교본에도 도시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염려하며 , 죽은 혼령 앞에 출도한 장관(壯觀)의 암행어사는 줄 떨어진 개밥통 격이 되어 오장 터지는 박수 한번 제대로 갈겨줄 개제가 없어지는 꼴이 될 것을 모두는 염려한다.

      나는 애초, 언젠가 기회가 주어져 「춘향」이를 요리할 때가 된다면, 처음 장면을 꼭 옥(獄)에서 죽어 나자빠진 「춘향」이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 다음의 세계는 아주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정(假定)한 나의 신비(神秘)도금(鍍金)적 몽환은, 언제나 그 미지의 자유언덕을 향한 분망한 야간비행을 시작할 수 있었겠다. 그 자유야 내 한계 안의 자유겠지만, 어째거나 그렇게 시작한 춘향은 일단은 현실과 비현실을 제 맘대로 왕래할 수 있으니-, 그 다음의 얘기는 「춘향」의 숙명일 수 밖에.

      「춘향」이가 언제 살았든, 혹은 앞으로 살아 돌아 올 것이든 관계없이, 그 「춘향」이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입 맞추고, 버리고, 다시 껴안은 여자이기에,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좀 특별히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스스로의 상봉의 의미를 각별히 갖고자 하는 데 나는 유감이 있다.

      올해만큼 「춘향」이가 내장산 단풍만큼이나 허천난 일도 없을 것이다. 창극으로, 연극으로, 오페라로, 가무극으로, 무용극으로, TV드라마로 제작되어 국내외를 누빈 적이 일찌기 드물었고, 제각각 만드는 이마다 특별한 고유성과 독창성을 주창하고 나서기에,그나마 수 없는 세월 속에 만신창이가 된 가련한 춘향이는 또 다시 별다른 작가적 양식에 의해 억지로라도 헤픈 여자로 치장이 되어 우리 앞에 나서야 했다. 전통 한국 춤을 춰야 했으며, 가야금에 창(唱)을 해야 했으며, 현대무용에 가랑이를 찢어야 했고, 피아노에 목젖을 올려야 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선 춘향이는 다 그렇고 그런 여자였고, 만든이들에겐 특별한 의미를 인각한 나르시스트들의 말랑한 탐닉의 제리였다.

      만든이마다 제것 이전의 것은 다 화냥년이고, 작가의 몽환적 사추의 부산물이며, 어설픈 드라마트루기의 히어로일 것이라는-그 '단정의 반대급부'를 천명하고 나선 기막힌 대변 효과가 작가적 유약함의 은폐였다면 차라리 나는 일일이 악수라도 청하고 싶다.

      궂이 전통양식의 고찰부터 시작하자는 나의 작업은, 그 누가 얘기한 전설 속의 요조숙녀도 아니요, 반항적 작가의식이 배양해낸 첨단의 엑스숙녀도 아니요,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강박감이 빚어낸 '어찌-현대시리 맨들어 볼 -그냥 마구 현대숙녀라야 하는-그런'여자도 아니요, 아무 여자도 아닌, 배역 맡은 그 누구라도 좋은 당사자식 「춘향」이면 되었다. 어차피 현대화란 것은 현대를 사는 여자가 무대에 서게 되니 일차적 논거는 해결된 것이고, 160분을 끌고 가는 극적 파워와 작가적 양식과 변수가 말해주는 것이기에, 줄곧 시대마다 그 시대에 현대화되어야 할 특별한 의미의「춘향이의 춘향이 짓」은 논외의 문제였다.

      손목을 잡으니 심장을 맴도는 피돌기의 요동은 윗가슴 아랫가슴을 내리 휘저으며 방망이질 해대는데, 삭풍에 살점 떼는 관솔불 같은 눈빛은 이미 그대의 찢어지는 가슴을 알고도 남아, 그대 등돌려 내게 차마 마음에 없는 위로라도 한마디 던질 것을 내 이미 짐작하여, 나의 마음은 마오 마오 그러지 말라 이 상황을 헤아리는데, 왜 나의 입에서는 아직껏 그대 손금만을 읽고 있는가?.... 이러한 춘향은, 관객은 저만큼 가는데 그녀는 아직도 제자리인 셈이다. 나의 춘향이는 최소한 이러한 「춘향」의 극적 행보를 동행하고자 하는 관객들의 시선과 느낌을 존중하고 싶었다. 한국사람치고 「춘향」을 모른다면 말이 안될뿐더러, 이미 이렇고 저런 그녀를 다들 만나 본 터에, 단지 음악적 (성악적) 증폭이라는 미명하에 하나의 상황 속에 관객을 끝없이 잡아 놓을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볼것 없어 눈 허전하고 듣는대야 지게목발 소리에 귀 허전하던 마당에 찾아와, 가락가락 내 신세요 마디마디 내 청춘이던 시절이 아니니 말이다.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을 들추자니, 첫째는 내 자신 또한 그 구호의 강박사슬에 자유로워야함이 점검되어져야 할 것이고, 둘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음악극으로서의 서구의 오페라에 비견하는 음악적 틀을 관현악의 음궤에 쌓아 보자는 것-그런다고 그 음악은 음악대로 독립된 하나의 음악이 드라마에 합쳐졌다고 우기는 농아(聾兒)가 있다면, 그것도 나의 춘향이가 만들어 낸 수많은 장외인물 중의 하나니까 그나마 재미있는 부산물일거고, 아뭏튼 북 하나에 목청 하나로 버티던 우리의 자랑스런 고유성이라는 것이, 그것도 우리네 악기로 편성된 오케스트라에 의해 음악적 마디(악보)의 콩나물을 펄펄 끓여 대고 싶었고, 셋째로 전통적 연희술을 일단은 수용하되 과감히 버리고 취해야 할 것에 양보하지 않는것. 연출의 변에 밝혔듯이 차후에 습작해 봐야 할 표현적 양식의 감각적 춘향을 내 놓았다가는 바탕소리에 근원을 둔 성악적 틀을 전면 재고해야 할 것이기에 시기상조인 것이고, 그러기에 정통 리얼리즘에 간근한 극적 연희를 감히 제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소리는 소리제로' '드라마는 드라마답게'의 터울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이 관건으로 승부감을 가졌고, 다섯째는 내 이미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상 가설무대 국극 춘향으로부터 수없이 만난 어떤 춘향도 좋을 내 내면의 춘향을 기지개 켜는 20세기의 새로운 아침녘에 만나는 대로 줄줄이 자유롭게 이으면 될 것이었다.

      모두의 작가의식은 이미 그가 터득하고 습득한 생리적 심리적 현상에 다름 아닐 것이고, 다만 어떤 형식이나 틀을 빌려 그의 사유를 인정하자는 것일진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자기로부터의 탈출은 본디의 자리를 다시 밟자는 자유희구의 부단한 몸짓임을 - 막이 오른 무대를 보며 잠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이제는 또 다른 자유로움으로 미몽간에 달려오는 저 붉디붉은 치마자락의 설레임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제 삶의 방식만큼이나 모습을 그려내는 시대마다의 [춘향]은 당자의 진실만큼 보여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 '진실' 속엔 <감동>이 존재해야 하며, 그 어떤 모습의 감동이든 일단은 객관의 나를 감동시키고 나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1994년 12월호

제목 날짜
예술인의 재주 2015.02.14
예술정책과 가치기준 2015.02.14
지역민으로 살다 보니 2015.02.14
제15회 전북연극제 심사총평 2015.02.14
이제 기업이 나서야 한다 2015.02.14
溫故知新을 위한 世紀末의 獨白 2015.02.14
제작시스템 가동을 기대하며 2015.02.14
월드컵과 문화축제 2015.02.14
향기와 소롯길에 대해 2015.02.14
제2회 전북청소년연극제 심사총평 2015.02.14
새로운 생명의 환영으로 태어난 심청 2015.02.14
적묵(寂默)의 감동으로 남는 무대 2015.02.14
제20회 전국연극제를 준비하며 2015.02.14
우리 소리가 중심이 되는 소리축제 2015.02.14
미소 짓던 피칠의 손 2015.02.14
자유롭다는 춘향이 2015.02.14
전주시립극단에 바란다 2015.02.14
전북도립국악원이 지향했던 창극의 방향 2015.02.14

주소 : 전주대학교 공연엔터테인먼트학과 예술관 308호
전화 : 063-220-2708 HP : 010-6777-6111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