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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명의 환영으로 태어난 심청

유니버설 발레단 창작발레 <심청> 공연평

    새로운 생명의 환영으로 태어난 심청

    박 병 도 (연출가, 전주대학교 교수, 전라북도연극협회 회장)

       

      모든 예술의 최고과제는, 형태를 빌려 한층 고상한 실재의 환영을 낳는데 있다고 괴테는 말하였다. 우리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현실을 극복하는 새로운 환영(illusion)의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자연스레 인정해 왔다. 그것은 무대적 상상력에 의한다면 일종의 '약속의 비약'(leaps of faith)일수 있으며, 그 거역할 수 없는 비약은 현실과 유리된 공간에 갖는 승복할 수밖에 없는 경외감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극장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떠한 극적 환타지일지라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정서적 장치로의 감각의 변환이 스스럼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환영이라 할지라도 모두 감동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정선된 정서에의 감성적 호소가 치밀한 미학의 형식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환상의 형태가 우리네 일상의 정서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형식에의 창조적 접근이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연유에서의 금번『전북도민일보』가 초청한 [유니버설 발레단]의 창작발레 <심청>은 우리의 관념적 정서에 일대 변화를 도모케 한 쾌거로 주목되고 있다.

      무대공연예술의 주된 에너지원은 태초 이래로 가장 숭고하고도 근원적인 '인간 몸짓'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 동선(動線)의 미학적 집약의지는 모든 창조자의 메시지가 희원하는 하나의 출발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설화나 고전의 재현에 있어서는 더욱 어려운 과정을 담고 있는 것 또한 '인간의 몸'을 빌어 창조되는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월을 감내해야 했는가.

      발레로 보는 '심청'은 이미 우리가 숙지하고 있었던 '심청 이야기'의 관념을 색다른 감흥으로 대면케 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선 어쩌면 이미 잘 알고있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넘지 못할 표현의 식상함을 작품은 잘 극복하고 있었다. 이미 미국공연을 통해 극찬을 받은 공연이라 해서 그 '검증'이 고국무대에 통용되리라는 전제는 가설키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무대 미학을 또 다른 발레의 형식미를 통해 발견했던 것이고, 완성된 형식미로 보여 준 전통소재의 현대적 재창출이, 우리의 정서와 오감에 능동적으로 전달되고 있었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창작발레를 떠나 전통소재의 현대적 복원은 쉽지 않은 결과의 전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시대적 괴리감이 갖는 일종의 불완전한 형식미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수정의 과정을 감내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된 형식미의 틀거리를 창출하고자 했던 [유니버설 발레단]의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은 그러한 기우를 불식시키고 남음이 있다.

      주제와 소재를 떠나 완성된 하나의 작품을 만국공통의 형식에 실어 내는 무대예술의 과정이야말로, 이미 존재하는 제 장르의 형식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혜안의 감각을 동반하고서야 가능한 일임을 <심청>의 무대는 웅변한다. 여기 우리에게 던지는 몇 가지 창조의 미학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첫째, 이미 잘 알고 있는 스토리를 무한한 상상의 영역에서 다시금 헤아려 보는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연극이나 창극, 또는 오페라 등으로 창조된 <심청>은 모두가 대사나 가사를 통한 서술적 설명을 제공하였었다. 그러한 구술이 동반한 스토리텔링은 적어도 인간의 몸짓이 제공하는 상상의 근원을 상당부분 삭감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써, 적당한 관념적 이해를 주문한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즉 우리가 두시간 동안 지켜 본 '심청'이의 애환과 사랑과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의 나래는, 저간의 구술적 보완이 얼마나 삭막한 단상에의 천착이었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라 하겠다.

      둘째, 그간 우리에게 주입된 '심청'이의 상징 이미지는 '효녀' 그 자체였을 뿐이며, 지성으로 아비를 공양하고 목숨까지 던졌다가 다시 환생하여 아비의 눈을 뜨게 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아주 교훈적인 내용에 판 박힌 소녀의 이미지를 뛰어 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에 만난 '심청'이에게서 또 다른 그의 러브스토리를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없는 즐거움을 맛본다. 심청이가 사랑을 하다니.... 심청이의 로맨스를 목격할 수 있다니.... 이러한 극적 비약이 가능케 된 원동력이야말로, 바로 새로운 시각으로 해체와 조합을 자유롭게 구사한 제작진의 또 다른 형식미가 아닐 것인가?

      이승에서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용궁에서의 사랑이야기는, 권선징악의 결론적 메시지에 충실하였던 기존의 도덕률을 단숨에 초탈하는 하나의 심미안적 위안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또한 3막의 궁중에서의 왕비로 간택된 이후의 사랑의 초야는 언어예술로 승화시키지 못했던 순결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선사한 배려라 하겠다. 그러기에 다시금 재조명된 심청의 이미지는 '효녀'라는 보편적 가치를 초월하여 또 다른 상징적 카데고리에 의미를 남긴 과제로 남아 있다.

      셋째, 사실과 비사실이 공존하는 무대로써 극적 환타지아를 한껏 발산해 낸 효과적인 구성이 돋보인 무대였다는 사실이다. 동양적 환상과 그 변화무쌍한 표현의 미학을 제공해 준 무대는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는 한국적 환타지의 재창출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주었다. 소설로 읽다가, 연극으로 보다가, 오페라로 듣다가 놓쳐버린 '물밑세계'의 환상을 이처럼 적절히 표현해 준 무대는 흔치 않았으리라. 기왕지사 용궁이 설정되었으니, 그 해저의 신비가 상상의 물결을 타고 관객 앞에 무한히 펼쳐지는 장관을 어찌 놓칠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미학적 상상의 근원이 제반의 예술성향에서 독창적으로 부단히 생산되어져야 함을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섬세하고 정교한 소품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재창조된 환상적인 의상, 그리고 그 기본 세트 이외의 모든 시각적 풍성함을 변화무쌍한 집단적 Grouping으로 형상화 해낸 무대미학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한다. 이는 관념적 이미지에 안주하였던 그간 용궁장면의 식상함을 일시에 불식시키는 쾌거가 아닐 수 없음이다. 자라의 갑껍질이나 둘러쓰고 물고기 지느러미나 옷에 붙이고 등장하여 해저의 신비를 설명하려 했던 기존의 형식에 반성을 요구하게 한, 이 자유로운 상상의 결실이야말로 철저한 관념의 주입이 얼마나 위험한 창작에의 보호장치였는가를 보여준 일례라 하겠다. 이러한 하나하나의 의상, 소품, 장치, 동작에 이르는 조화로움은 치밀한 실험이 완성해 낸 창작의 다양성을 역설한 것에 다름 아니다.

      넷째, 어차피 예술의 끝자락은 서로 맞닿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물리가 트이면 세상의 이치를 헤아릴 수 있다는 말처럼, 제각기 한가지 장르에 연연하여 그 형식의 완성에도 허덕이는 많은 예술가들이, 하나를 보아 열을 헤아려야 하는 무대예술의 총체성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발레로 이야기하려 했던 '심청'의 줄거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분한 미학적 고려와 더불어 그 '스토리의 이해'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즉, 기존의 무용극이 갖는 장면의 구성은 지극히 '기본무의 연결선상'으로 해결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의 창작발레는 그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 지극히 '연극적'인 제스처와 표정, 표현에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이 '연극적'이라는 어휘는 개개의 장르가 수호하였던 기준선 이상의 감정표현의 표정이나 몸짓의 제행을 두고 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용은 물론, 오페라나 창극에 이르기까지, 개개의 기능에 집착하여 그 하나의 표현양식에 얽매인 양태로 극적 표현에 임하고 있는 제반의 무대들은, 극복할 수 없는 연기적 역량에 있어서 유독 인색하리만큼 그 표현의 기술을 배척한 것이 사실이다. 곧, 조금만 적극적인 표정과 구체적인 감정이 가미되면, 곧바로 "연극적이네"라는 매도에 서슴치 않았던 저간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러한 자가당착의 암중모색이야말로 이번 공연을 통하여 보다 분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임을 밝힌다. 우리는 다른 것을 보지 않았다. 분명, 우리는 무용을 보았고, 인간의 몸짓을 보았으며, 나아가 발레라는 형식을 대면하였던 것이다. 그 발레는 곧 '심청'의 이야기를 발레로 표현하였는데, 딸을 떠나 보내고 울부짖는 아비의 애통함이나, 아비를 두고 끌려가는 딸의 비통함이나 모두 '연극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의 감정의 언어를 육화시켜 발산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그간의 비토는 스스로의 닫힌 눈과 기량에 기인한 것이며, 정답은 바로 연극적이다 못해 그 이상의 신체 언어의 기술을 무수히 쏟아내는 그 고도의 기량에 대해 차라리 근접치 못했었다는 사실로 고백해야 할 것이다. 맹인들로 분(粉)한 무용수들이 춤 대신 걸어 다녀야 했던 극적 개연성을 닫힌 감각들은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즐거운 단상을 헤아리면서도, 보다 완성도 높은 한국 창작발레의 미래를 기대하는 차원에서 옥에 티랄 수 있는 아쉬움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몇 번의 수정작업을 거치며 구성의 밀도를 높인 점은 아무래도 음악의 재구성에 크게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러한 음악적 배열에 있어서 긍정적인 결과에 못지 않은 부정적 산물은 아무래도 막별 도입부(intro) 부분이 지루하리 만큼 늘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새로이 동일 작곡가에게 개선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짜깁기한 흔적으로 보여지는 바, 특별한 장치의 변환이 새로운 개막의 시간에 요구되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소모적 기다림에 다름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둘째, 국외공연을 겨냥한 배려라 치더라도 태극선과 한삼, 탈이 차용된 한국무의 원형이, 발레의 테크닉에 부적절히 용해된 사실은, 좀더 그 궁극적인 선의 미학을 연구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발레의 선이 수용할 수 있는 한삼의 용도에 대해 고려가 뒤따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울러 3막 1장의 궁중에서의 왕비 간택의 점고장면은 사족과도 같은 아쉬움이 따랐으며, 우스꽝스러운 대신들의 몸짓도 그러려니와, 어우동 모자를 쓰고 어전에 등장하는 기생은 설정 자체에 무분별한 욕심이 뒤따랐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어찌됐든 우리는 또 다른 극적 환상을 체험하면서, 괴테가 역설한 '고상함' 이상의 실재적 환영을 감흥의 저장고에 다시 축적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이는 생명력 있는 표현의 몸짓만이 온전한 새로움을 다 아우를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철저한 장인의식은 자기의 장르를 초월하는 새로운 힘으로 변환되어, 주변의 매체에도 더욱 싱그러운 약진의 신호음으로 전파되고 있음을 이 새봄에 확인하고 있다. <끝> 2000년 3월 12일 - 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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