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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으로 살다 보니

      [우리文化]-[문화시평]

      지역민으로 살다 보니

      박 병 도

    지역마다 '지역정서'라는 미명하에 지역문화의 특장(特長)을 규범화하고 있다. 예컨대 지역문화의 근간을 보존·계발해야 하는 관립예술단체가 만들어 내는 제반의 문화행동이 그러하고, 이에 대비되는 순수의지의 민간예술단체가 창출해내는 독자적인 행보가 또 하나의 틀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것이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대체적으로 민간의 순수의지가 열악한 조건하에서 추구하는 절대적 소임에 분투하는 반면, 관립의 수행형태는 비교적 보장된 여건에 의해 확산의지를 펼쳐내는데 열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화행동이 다분히 생산해 내는 자들만의 몫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한다면, 행동의 부산물에 대한 비판과 감시의 기능이 지역문화의 제고(提高)에 기여하는 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비제도권 문화세력이 들추어내는 감시와 비판의 대안들로써, 현재진행형의 문화력 형성에 또 하나의 논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생산자의 제행(諸行)이 어떠한 생산여건 하에 놓여 있건, 또는 어떠한 이슈를 제시하였건, 비판의 세력은 그러한 생산의 장치가 풀어내지 못하는 새로운 지향점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소중한 역할로서 상호 조력하는 이들의 문화행동은 '지역정서'를 구축하는 미력(微力)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다분히 '지역정서'에 간섭받으며 성쇠(盛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세력이건 스스로 규정해 버린 '지역정서'라는 무기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함으로써 지역의 정서에 반(反)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만드는 자들의 인식 부족이나 철학부재의 현상이 본질을 오도하는 형태로 발전하는 경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비판이 오판(誤判)이 되는 감시의 기능이 '목적을 수반하는 정서'를 앞세워 또 다른 변모를 획책한다면 이 또한 큰 우려가 아닐 수 없다. 지역의 제도가 보장하는 문화행동에 있어서, 그들의 창출소임에 지역의 정서까지 담보하여 맡겨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믿고 있는 '지역정서'는 다름 아닌 지엽적 인사의 비호(庇護)에 다름 아닐 것인 바, 이에 대응하는 감시의 세력은 또 다른 '지역정서'를 앞세워 좁은 지역사회 안에서의 할당된 '밥그릇'에 대한 제몫 찾기에 열중하는 행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지역의 현안과 미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시각은, 자기의 몫을 떠나 진솔한 공리에 입각할 때 제반의 껄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어진 임무에 대해 솔직담백한 자기고백이 선행되어야 자신의 역할이 적절한 것인지, 지역에 기여될 것인지 답이 나올 것이며, 나아가 타산지석의 광범위한 혜안의 비교능력 없이는 그나마 좁은 국량(局量)의 대안으로 지역에 존재하고 말 것이다.

    요즈음, 못다 펴본 역량을 펼쳐 보자는 취지에서 본인은 줄곧 이어지는 타 시도의 초빙 연출작업에 몰두하였다. 중앙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민·관립 예술단체와 작업을 하면서 지역적 특색과 문화적 풍토의 극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고, 그러한 문화 창출인력들의 문화적 시각이 동상이몽의 지역정서에 근간하여 상충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저버릴 수 없었다.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정작 다른 노를 젓고 있음으로써 지역문화의 발전일로에 찬물을 끼 얹고 있는 충돌의 힘들--그나마 그러한 충돌이 충돌임도 모르고 있는 현상에 대해 나는 느낀 점이 무척 많았다.

    지역은 나름대로의 지역적 자긍심을 전제로 하는 지역 보편주의의 문화적 쟁점을 보물처럼 떠받치고 있는 것인데, 중앙의 그것과 비견하는 문화력의 소외현상에 대해 힘주어 "중앙은 변형된 지방문화의 집합체가 아니던가?"라는 구호로 메꾸고 있는 현상은 대동소이하게 지역이 갖는 자존의 공통분모였다. 그러나 그러한 지역 자존주의가 갖는 또 다른 맹점은 지구본식 글로벌리즘의 지역중심주의가 지자제의 실시 이후 더욱 팽배해진 연유인 바, 절대적 진단과 평가가 선행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판을 벌려 온 일종의 '치적위주의 위기의식'이 가져 온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만인에 회자되어 왔던 지역의 '축제문화'이고, 그 대동소이한 좌판나열식 '모방문화'는 동네 사랑방의 머슴들이 주인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지역패배주의로 전이(轉移)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중앙에 비견하는 지역문화는 이 21세기를 관통하며 정작 새롭게 헤아릴 수 없는 일인가? 중앙의 그 약삭빠른 모방의 변질이 '세련'의 터울을 쓰고서, 매스컴의 집중지원을 등에 업고서 우리 앞에 군림하였던 지난 세월을 보상하려면, 그 얼마나 많은 굴욕과 패배와 수모의 찌꺼기들에 시달려야 할 것인가. 그러한 중앙문화에 제반의 소스(소재, 인력, 자원)를 제공해 왔던 순수 원류의 지역문화는 과연 어떠한 '쥐'들의 방자한 술수에 의해 가상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고 허무한 재원과 세월에 시달려 왔단 말인가. 그러한 허무주의는 또 다른 앙심을 작용하여 지역을 박차고 탈출하는 문화인력군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소신없는 기회주의는 '원님 덕에 나발을 불' 요량으로 문화 수급의 현장에 한 자리씩 차고앉아 콩·팥을 버무르며 문화력의 제고(提高)를 부르짖고 있으니, 차라리 진(晋)나라 개자추(介子推)가 문공(文公)의 무심함에 상심하여 금산(錦山)에 들어가 까맣게 재가 되어버린 고사로나 위안 삼아야 할지.

    지역문화를 선도한다는 이들의 또 다른 '한껀주의'는 무분별한 '즉흥주의'의 발로에서 비롯된다. 그 내면의 저의에 모두가 침몰되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외치고 보자는 선동적 구호에 추종하는 묵계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 통용되는 '묵계'엔 수직적 계보관계, 역학적 신분관계, 사회적 친분관계가 얽히고 설켜 일언반구의 이의도 소멸된 채 쌍수의 환호가 뒤따르는 것이니, 지역(地域)이 지역(地易)으로 가든 말든 상관없는 현재 진행주의에 충실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독특한 지역정서가 배어있는 지역문화의 산물을 널리 선양하자는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가 열리는 곳에서의 한 지역 인사는, 그 대회의 규모가 가히 전국적이다 못해 세계적이지 못해, "애시당초 대회명이 잘못 되었어요! 그놈의 전국자(全國字)가 맨 앞으로 나와야 될 일이었지 뭡니까? '전국민요 남도경창대회'가 되어야 옳아요."라고 열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모순이었다. 그것은 즉 '남도민요'라는 독특한 지역산물의 예술장르를 규정하여 그 범주로 동의하는 전국의 명창들의 실력을 겨루어 내자는 것이지, 전국의 민요를 다 모아 놓고 우열을 가리자고 하는 발상부터가 과욕이요 오산임을 모르고 있었다. 유일무이한 자기 것의 소중함과 독립적 가치기준을 욕심으로 벌려 보자는 물량주의에 스스로를 괴멸시키고 있음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역 인사의 외침에 일언반구 이의를 제기치 못하는 지역의 패거리주의는, 그 역량있는 분의 '즉흥적 우월의식'이 재고의 없이 또 다른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존경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야 지역주의 동승하는 충실한 지역의 일꾼으로 인정을 받게 되니 말이다.

    이러한 지구본(地球본)식 문화중심주의가 경기민요의 <창부타령>, <노랫가락>, < 닐니리야>, <도라지타령>, <베틀가>, <는실타령>, <이별가> 따위의 이른바 통속 민요와, 경상도민요의 <밀양 아리랑>, <골패타령>, <쾌지나칭칭나네> 등등의 메나리조 가락과, 강원도의 <강원도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 <한 오백년>의 토속민요에다가, 남도민요의 대표격인 <흥타령>과 <육자백이>를 섞어 판을 벌리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자연 자기지역의 민요가 더 우월하고 대단하다는 자부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니 지역민의 호감을 사는 것은 일차적인 것이요, 거기에다 경합의 결과엔 응당 자기 것의 승리를 귀착하고 시작된 발상이니, 어찌보면 그러한 지역편중의식은 타지역의 독자적인 문화산물까지 업수히 여기는 것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막을 내리고 지금껏 여론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는 [전주 세계 소리축제 예비대회]의 결과를 보라. 그러한 방만함과 오만함이 가져다 줄 결과는 이미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지 않은가? 비엔나의 소리가 세계적이지 못해 거기에 동양의 소리를 끼워 놓고 상품화를 시도하려 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전주의 '세계적인 소리'를 축제화 시키는줄로만 알았던 나는 '세계의 소리'를 전주에 모은다는 발상'에 어리둥절하였고, 우리고장의 대표적인 문화 경쟁력일 수 있는 판소리의 '세계성에 대한 확인의 자리'인줄 알았던 나는, 세계적인 여러 사운드문화에 프리미엄을 주고 한판 출전시킨 '부상당한 판소리'의 일방적 패배에, 이렇게 불행한 홈그라운드 게임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지역적이지 못해, 또는 그 살고 있는 지역에 충실하지 못해, 세계병에 걸려있는 강박관념의 탈지역주의는 산너머 이대감댁 머슴 칠덕이의 쇠스랑을 부러워하며 제 연장 탓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판을 벌리는 한계는 어찌됐든 '세계적' '국제적'인 수식이 붙어야 제대로 판이 짜인다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다. 일본의 '사천왕사 왔소'라는 축제는 세계의 사천왕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발길을 모으고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브라질의 '삼바축제'는 국제적인 '삼바맨'들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또한 '세계 삼바'라는 구호로 치장하지 않아도 세계의 각종 화폐를 다 긁어모으고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의 안티테제(antithese)에도 문제는 분명 존재한다. 대회의 기획, 내용, 운영, 결과 등에 대해 시시비비가 오가고는 있지만, 정작 발전적 미래지향의 대안에 대한 명확한 지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혹이나 내년의 본대회를 앞둔 주도의 몫에 침을 바르자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역정서를 양식으로 내세우는 기치나, 지역정서를 무기로 대항하는 비판이나 모두 염원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는 문제다. 정작 지역민의 생각이나 소신이나 관심에는 무관한 채 말이다.

    우리 자존의 것을 이렇게 소홀하다 보니 각 분야에서 결실을 본 문화력의 산물들은 이미 지역을 떠나고 없다. 대표적인 예가 지방의 무형문화재들인데, 이미 그 직능의 성취한 결과에 대해 평가를 내린 지역의 소중한 문화재인데도 활동의 내역은 지역을 떠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진도의 명물 '진도북춤'을 배우려면 서울로 둥지를 옮긴 박병천 선생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지방 지방문화재로 지정 받은 동초제 '적벽가'를 배우려면 대전에 터전을 잡은 민소완 선생을 찾아가야 한다. 그 이수자 역시 대전에 터전을 잡아 이수의 몫을 다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지역의 문화 산물이 홀대를 당하니 견뎌낼 재간이 없는 방황하는 문화의지가 되고 있을 뿐이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의 무형문화재는 그 지방을 떠나서는 않된다는 제도하에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아끼지 않고 있다. 하물며 제도적으로 지정하는 문화재들도 터전을 바꾸는 마당에 여타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인력들은 어찌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우리문화진흥회'가 개최한 [태산선비문화 학술대회]는 큰 의미가 있다. 우리 고장 태인과 칠보를 중심으로 일어난 선비문화와 가사문학과 향약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고 재조명하자는 데에, 전국적인 지성들을 불러모아 연구·발제하게 하며, 토론케 한 또 다른 자존은 가히 주목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세계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일이고, 또 그렇게 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고 애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 것이, 우리 사람이 홀대받아 어디에서 의미를 부여받겠는가 일깨워 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지를 보통 우리는 '보편적이지 않다' 하여, '독선'이라 치부하기 일쑤였다. 나는 그러한 일상의 관념적 판단에 기생하는 하기 좋은 '폄하문화'에 대해 일말의 동정을 보낸다. 강한 의지에 대한 동경이나 흠모를 자기최면시킨 채, 자기들 세상의 기준에 동승하지 않는다 하여 '독선'이라 치부해 버리는 풍토를 연민해 마지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카리스마'라는 것도 일종의 독선이고 보면, 그 카리스마란, '절대적 설득력에 기인하는 마력과도 같은 지도력'이라는 구절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설득력 없는 행동은 어떠한 문화력도 인양해 내지 못한다. 허공에 외치는 단발마적 식상함에 종속하자는 자기 패배의 목소리일 뿐이다.

    만주벌판에서 모진 시련과 싸웠던 독립군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조국광복의 신념과 싸웠기에 목숨을 건 '독자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그들의 행보를 두고 '독선적'이라 폄하할 수는 없다. 그 독자노선은 때로 어려운 재정에서도 불후한 백성들에게 군자금을 쪼개 양식을 나눠주는 그 '독선'을 베풀었고, 나라를 뺏은 괴수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마당에 의연히 나타나 초개같은 목숨을 도시락에 싸운 폭약을 까며 날리는 그 '독자적 독선'을 택하였다.

    이제 지역의 '독선'이 스스로의 허물을 깨치고 가장 보편적인 '지역정서'의 보호하에 자존의 새옷을 입어야 한다. 지역민의 말없는 방관이 가장 소중한 독자적 노선의 공감대 안에서 깨우침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문화 선봉의 깨우친 의식에 박수를 줘야 한다. 그러한 지역정서가 이 허전한 예향의 허울을 탈바꿈시키는 진정한 온기로 이 추운 겨울에 작용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 2000월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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