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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창고

虛數와의 同床異夢

문화는 때에 따라 많은 虛數를 공유하게큼 존재하고 있다.특히 서구에 비해 비논리적이며 극히 감상적인 동양권의 인식에는 보는이에 따라 비전문가도 능히 창조와 간섭의 범위를 조절케 하는 허수의 함정이 있다.윷판이나 장기판의 훈수 처럼 문화는 그 처연한 허공의 메아리로도 능히 製劑를 받을만한 만만한 것이 되어온 것도 부인 못할 우리의 풍토라고 말할 수 있거니와,하나가 아니면 둘도 가능한 것이고,둘이 아니면 셋도 무관한 것이 편의적 융통성이 되어,한국만큼이나 전문성이 정립되고 극복되지 못한 문화적 터울에서는,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무책임한 편의성이 자연스레 군살 박혀 있는 것이다.

굴지의 백화점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림도 따지고 보면 붕괴 일로에 자신들만 피한 비양식적 기업윤리만 탓할일이 아니라,그들이 분명 놓치고 있었던 허수의 목적을 지향한 변태적 용도변경과 설계변경,그리고 무심한 비전문적 운용에 의한 원인제공을 짚어 봐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그래도 된다는 모두의 방심과 무관심이 어쩌면 자연스런 생리적 작용으로 이 사회를 지탱해 가고 있음인지도 모른다.그러한 기업문화,그러한 건축문화,그러한 시민의식이 21세기의 문턱에서 지극히 자연스레 공생하고 있는 것이며,전혀 새로운 돌파구만을 찾아 헤매는 몽매한 의식의 그림자에는 정작 그 근본적 원인을 육중한 철골로 메워 버리고 있음으로 마감되고 포장되어 왔다.

그렇다면 문화창출의 진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하는가? 나아가 그 직접적인 비평의 기능은 누구에 의해 감수되고 책임져져야 하는가?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인정해야 하는 문화적 윤리는 아직 이땅의 요원한 바램이자 객관근거의 허수로 작용되고 있음이다.

지방에 있어서의 문화예술의 평가는 아무래도 미로에 선 암중모색일 수 밖에 없다.지역성의 탈피라는 대전제 하에 누누히 강조되어 온 바 있는 평론과 비평의 기능은 입십 센 몇몇 오피니언 리더에 의해 항상 조장되고 전파되어 온것이 사실이다.때로, 그것은 집단이기주의의 목적에 의해, 때로는 심약한 경쟁의식의 발로로 잉태되어 무지막지한 원론부재의 폄하행위가 자행되기도 한다.

그것에 비해 차라리 문예사이드에서 일말의 무시를 당하는 스포츠는 분명한 우열의 기준이 정립되어 있음으로서,10초 8은 10초 7보다 하위임이 분명히 밝혀 지며,시각으로 구별키 어려운 골인지점도 화상분석으로 명쾌한 답변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스포츠와는 분명 그 유희의 본질을 달리하는 예술에의 평가는 다수의 감상자가 공유하는 감동과 주제에의 접근을 우선해야 함을 주지해야 한다.

모두의 정서와 오감이 하나의 스토리에 편승하여,주어진 시간에 공유한 공간의 이미지를 어떻게 받아 들이고 인식하고 있는가는 특히 목적극이나 시대극에서는 더욱 그 반향의 질이 문제가 된다.그 제작의도에 감상자는 어떠한 반응을 가지며,나아가 목적에 분명한 궤환효과(Feed Back Effect)를 소유하는가 이다.그럼으로 예술행위는 상황에 따라서는 곧 정치집회와도 같다고 학자들은 말하지 않던가.분명 정확한 평가는 불특정다수의 관객 몫이다.이 시대는 분명 중세 왕정시대의 궁중극장에서 몇몇 귀족들만을 위해 보여주는 예술행위가 아니기 때문이고,또한 이시대에 더더욱 목적과 이해타산에 편가름한 몇몇 여론의 귀족을 위해 무대는 피땀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프로이드의 말대로 예술가는 다소 정신이상자들이라 치더라도,동종의 예술행위에 관계된 방관자들의 자기시각적 판단은 많은 오해의 여지를 창출하여 예술행위의 자유롭고 다양한 발전과 스타일의 전개를 방해하는 고답적이고 정체된 작업풍토로 묶어 놓을 엽려가 있는 것이다.또한 집단의 이기적 시각도 절대적 극단주의 내지는 흑백논리로 출발하여,전체가 지향하는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파괴하고, 집단의 우상이나 목표에 반하는 모든 행위를 적대시하는 협안의 자가당착에 얽메여 있음도 심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확히 표현 하자면,예술행위는 목적을 둔 부류의 평가라면 애초에 그 감상자의 평가원칙이 설정한 심리대로 무대는 펼쳐져 보일 것이며,모두가 필요로 하는 애정의 시선이 없이는 예술행위는 혐오스런 인간의 유희로 전락되고 말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러한 맹점은 그 주역를 서로 바꿔 행할 수 있음을 인식하여야 하고,문화적 카르텔에 의해 예술적 허수를 무심코 짚어 버리는 실수를 우리는 이 시대를 공유하면서 자행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콜롬부스의 달걀이 이시대에 예술적 폄하의 논거로 작용되는 아픔이 계속되는 한,지방화 시대에 몸부림 쳐 지방성을 탈피하자는 고고한 외침은 당자들의 무분별한 단죄에 의해 그 싹수를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전북도민일보 199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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