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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창고

재주와 메주

    예술에 있어서 표현의 문제는, 그것이 고상한것이냐, 비천한 것이냐, 산문이냐, 운문이냐, 양식적(formal)이냐, 사실적(realistic)이냐를 떠나 논의되어야 한다. 다양한 정보에 노출된 현대인의 오감을 타고 전파되는 예술 제행은 그러기에 자유로운 표현의 영역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보장받아 마땅한 이 논조가 해석에 따라 잘못 대입되고 있음으로서 또 다른 창조행위의 소모적 작업을 부추기고 있다. 선장과 조타수의 역할조차 구별 못하는 예술적 치기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자유와 방종조차 분별치 못하는 개념부재의 군상들은 목적관철을 위한 하나의 '용어'나 '정의(定意)'를 찾아내어 그것에 위로 받고 안주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공격의 당위성을 찾으려 부단히 매달리기 십상이다. 그것은 소임과 역할을 구별 못하는 방종의 시각이 찾아내는 일련의 도피처다.

    현인임을 자처하던 희랍의 궤변가(sophist)는,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 있다'고 정의함으로써 우매한 군중들을 현혹시키고 남음이 있었지만, 그 날아가는 순간 순간의 <정지>의 이어짐이 연속적인 정지상태라고 설명하던 시대와는 달라져도 한참이나 달라진 오늘의 세상임을 모르는 이가 우리의 주위에 퍽 많다.그래서 하나의 보호막이 될 정의라도 붙잡고 나서게 되면 그 순간 어떠한 사석의 논쟁에도 양보가 없으며, 총론에 받침되는 각론의 소임도 망각해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주어진 임무를 과대포장하거나 닫혀진 자신만의 세계에서 미몽의 변주곡을 강조(reword)하고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에 '선 무당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또한 '헤엄을 자랑하는 자 물에서 죽고, 활솜씨 자만하는 자 들에서 죽는다'고 했다.이는 얄팍한 재주를 두고 경고하는 말이다. 그 재주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 기생하며 절대적 평가를 유보 받은 채, 마냥 선동적 제스츄어로 활개를 치고 있다면, 이는 고장난 여과장치를 통과한 정수기의 물을 너나 없이 마셔대자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 재주가 고도의 아부로 변환되어 사회구조의 헤게모니를 삶아댔든지, 혹은 수없이 비워낸 소주잔에 궤변을 섞어 사회구성원의 동정을 유발시켰든지 간에, 고금소총에나 나올 법한 '마누라 바꿔 잔 담합'이 우리 주위에 횡횡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해될 수 없는 예술적 암약이 심판의 눈을 가린채 창조의 링을 종횡하고 있다. 너도 먹고 살고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밀약해 버린, 무조건적이고도 무차별적인 예술적 거간(居間) 행위가 얄팍한 재주들을 과대포장해 버리고 있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는 차이가, 오늘날 악몽 처럼 다시 피어나 목적수반용 궤변으로 혹세무민된다면, 주어(主語)와 술어(述語)가 바뀐 문장도 논리성을 인정 받아야 하겠는가. 그러나, 본질을 간파하는 현자들의 시선도 우리 주위에 적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사회를 이끌고 가는 오피니언 리더의 일관된 시각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싶다.

    90년대 한국영화의 개가라 일컬으며 공전의 히트를 친 <은행나무 침대>의 화려한 주인공들은, 이 작품이 드라마틱한 서사구조를 가진 환상의 스릴러였기에 가능했던 찬사를 따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세익스피어적인 대사나 연기로 화면의 시종(始終)을 무게 있게 이끌고 간 연출력을 자신들의 반짝이는 재기로 희석시키려 들면 않된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구상하고 해체하고 조합하는 --숲을 만드는 일에 연출력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망각하고 날뛴다면, 이미 그들은 경거망동한 무협소설의 주인공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예술적 표현과 개체의 역할도 기본 컨셉트(concept)에서 일탈하면, 이미 그것은 예술적 주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고도의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그 우매한 마스터베이션은 창작의 숲에서 홀로 떨어져, 가당찬 개인적 야욕에서 발생한 특정부분의 과시욕을 채우려는 동상이몽의 반칙행위로 발전되기도 한다. '토끼가 춤추고 여우가 바이올린'하는 산중(山中)의 축제는 바로 호랑님의 생일날이었기 때문이고, 또 여우의 바이올링이 제아무리 현란타 하되, 독수리의 지혜의 플랜에 의해 움직여지는 일이니, 호랑님은 축제를 만드는 가감과 승제의 가르마를 명쾌히 인식해야 할 일이다.

    태산(泰山)은 흙과 돌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 과묵한 그릇의 문드러진 속은, 더이상 '껍보리 서말'에 아쉬어 '덜미 잡힌 처가살이'를 말아야 한다. 참으로 예술을 만지는 자들의 깨우친 도량이 절실한 때이다.

    1996년 7월 23일자 전북도민일보 [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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