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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창고

봄날의 꿈

    심리학에 '컬러 다이내믹스'(color dynamics)라는 용어가 있다. 즉, 연상되는 색의 상징성에 관한 꿈같은 이야기다. 가령, 富와 권력의 상징인 임금의 곤룡포는 '황금'의 색에서 빌려 왔고, 위급과 경고를 상징하는 소방차나 앰뷸런스의 색깔은 '불'이라는 형체에서 빌려 왔으며, 생명력과 안전과 휴식을 상징하는 이미지의 원류는 '녹음의 수풀'에서 빌려 와, 감각과 감성의 직접적인 전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꾸는 꿈은 다양하다. 방금 꾸었던 꿈에 대해 선명한 색깔을 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가령, 빨간 소방차가 긴급히 지나가는데, 노랑색 우산을 쓰고 가던 아이가 손을 흔드니,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더라는 선명한 꿈의 색깔도, 알고 보면 꿈 속의 꿈같은 상상의 작용이어서, 우리가 꾸는 꿈은 아쉽게도 '흑백'이라는 내용이다. 다만 그것을 칼라로 인식해 낼 뿐이라는 아쉬운 과학적 사실은, 차라리 안들은 것만 못할 것이다.

    꿈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가 아니라, 과거 '애수'나 '카사블랑카'에 등장하는 '비비안리'나 '잉그릿드 버그만'의 피부색깔 만큼이나 아쉬움과 기대감의 상상에 의존하는 속성이 내포되어 있다.

    꿈은 염원 속에 꾸어지고, 기대 속에 풀이되며, 아쉬움에 깨어진다. 꿈은 상상을 실현하고, 현실을 초월하며, 시공을 왕래한다. 그러기에 봄날의 오수에 잠든 이들의 뇌리는, 겨우내 얼었던 현실의 고난을 해빙하기 위한 뒤척임으로 노곤하다. 염원하고 빌어서 얻어지는 꿈의 실현이라면, 현실을 잠시 접고서라도 꿈의 세계에 한껏 유유자적하고플 세인의 바램은 늘 꿈속에 존재한다.

    문화가 분화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비는 사람이 제일이었다. 빌어야 살았다. 씨를 뿌리던 농부가 그랬고 제사장이 그랬다. 말라 붙은 논바닥을 두고 하늘을 향해 빌 수 밖에 없었고, 신의 영매가 나약한 인간을 대신해 빌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림과 생산을 기약하는 계절'로 이해되는 봄은, '보다'에서 비롯된 말로, '보다'의 어간 '보-'는 중세국어의 '보(쟁기)犁:<훈몽>', '보(방축:<유씨명>)', '보(包<역해>)', '보(樑 ; <법화>)' 와 친연성이 있다.모두가 생산과 가능성의 뜻을 갖고 있다. 쟁기는 밭갈이에 사용되니 생산의 도구이며,방축도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농사에 물을 대어 주니 생산의 일이다. 보자기는 어떤 사물(씨앗,아이)을 간수하거나 기르고, 대들보는 집을 장만하여 정착할 수 있게 하니 보다 큰것을 바탕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보는 것은 나아가는 것이요, 꿈을 던지는 것이요, 느끼기 위한 전조이다. 그러기에 봄은 다분히 시각적이고, 봄은 계절 중에서도 시각의 구실을 하는 계절이다. 인간의 감각과 동작은 시각적 경향이 있거니와, '입어 보고, 만져 보고, 먹어 보고, 맡아 보고, 들어 보고, 느껴 보는' 일이야 말로, 어두운 육신을 밝혀 주는 등대와 같은 살맛이리라. 무엇을 보고 느낀다는 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기초적 행위가 아닌가?

    꿈과 부활의 상징인 봄. 이러한 약동과 전진의 계절에 '옹색'과 '궁핍'으로 점철된 지난 겨울의 추억을 버려야 한다. 빈곤한 무대, 썰렁한 객석, 초라한 배우, 민망한 관객의 공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어줍잖은 핑계와 현실도피는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그것이 이미 전통과 관습에 얽메인 하나의 등식을 이룬다한들, 변모하는 세태에 대입 못할 낡은 자존심인줄 알아야 한다. 늘상 가마솥에 밥을 얻혔다고 전기밥솥을 무시하는 우격다짐은 위험한 착상이다. 요즘은 불후의 흑백영화도 컴퓨터그라픽으로 물감을 드려 다시 보는 세상이다.

    관객을 버리고 있는 무대를 보노라면 아쉬움을 넘어 난감한 지경이다. 이렇게 난감한 정황을 일러 '봄사돈은 꿈에도 보기가 무섭다'고 했다. 보릿고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대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니 꿈에 볼까 무섭기도 하겠다. 아무려면 불가능을 극복해 줄 상상의 '꿈'에서 마저 보기가 무서운 '사돈'의 꼴로 무대가 부각되어야 하겠느냔 말이다. 연극이 그렇고, 창극이 그렇고, 오페라가 그렇고, 뮤지컬이 그렇다.

    무슨 수는 없을 까? 경기가 이렇고 불황이 어떻고 하는 점도 묵과할 수는 없으나, 정작 만드는 자들의 인식의 전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탁자 위의 콜롬부스 달걀만이 아니라, 공중에 매단 달걀도 하나의 컨셉으로 꾸어질 꿈이다. 아니, 현실이다.

    우리는 무엇을 연상하는가? 무슨 상상의 이미지에서 이 봄의 희망을 논하려 하는가? 지금, 우리의 무대는 어떠한 '드림 다이내믹스'로 와 닿고 있는가?

    [전북도민일보] 문화칼럼 1997년 4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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